침묵의 의미 / 법정 스님   2020-09-03 (목) 15:29
도솔암   23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뱉어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
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뱉어내느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이전에는 사람끼리 마주 보며 말을 나누었는데,
전자매체가 나오면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지껄일 수 있게 되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유언비어나 긴급조치에 위배만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비위에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그 말의 내용이 아첨이건 거짓이건
혹은 협박이건 욕지거리건 간에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다.
가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풍토이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 보면
대부분 하잘것없는 소음이다.
사람이 해야 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하다.

좋은 친구란 무엇으로 알아낼 수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보는데,
첫째 같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아닐 것이고,
벌써 이렇게 됐어? 할 정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는 정다운 사이다.
왜냐하면 좋은 친구하고는
시간과 공간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기도를 올려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기도가 순일하게 잘될 경우는
시공(時空) 안에서 살고 있는 일상의 우리지만
분명히 시공 밖에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자꾸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 되면 그건 허울뿐인 기도다.

우리는 또 무엇으로 친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 말이 없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그런 사이는 좋은 친구일 것이다.
입 벌려 소리 내지 않더라도 넉넉하고
정결한 뜰을 서로가 넘나들 수 있다.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구슬처럼 영롱한 말이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오고간다.
그런 경지에는 시간과 공간이 미칠 수 없다.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똑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 가지고서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 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 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 비어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수도자들에게 과묵이나 침묵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고여 있는 말씀을 비로소 듣는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미처 편집되지 않은 성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활자화되어 있지 않은 그 말씀까지도 능히 알아듣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불경에 있는 말이다.

일상의 우리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써만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체는 저 침묵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데에 있다.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 마음에서도 큰 광명이 발해진다는 말이다.

참선을 하는 선원에서는 선실 안팎에 '묵언(默言)'이라고 쓴 표지가 붙어 있다.

말을 말자는 것.

말을 하게 되면 서로가 정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시와 비를 가리는 일이 있다.

시비를 따지다 보면 집중을 할 수 없다.

선은 순수한 집중인 동시에 철저한 자기 응시이다.

모든 시비와 분별망상을 떠나서만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 수 있다.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기능도 하고 있다.

구시화문(口是禍文),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선승들은 3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묵언을 지키고 있다.

그가 묵언 중일 때는 대중에서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수도자들이 이와 같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만을 하기 위해서다.

침묵의 조명을 통해서 당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다.

벙어리와 묵언자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하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히는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1974)


《법정스님의 "무소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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