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절 마당가 다시 차오르는 봄빛, 맑은 바람결은 사랑 되뇌이는 듯   2012-05-18 (금) 13:18
도솔암   2,750



낙조대에서 바라본 도솔암 내원궁. 험준한 바위 위에 얹혀 있다. 오른쪽 낭떠러지에 새겨진 것은 고려 시대 마애불(보물 1200호)이다.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오래 전부터 나는 당신께 한 번쯤 소리나는 대로 편지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막걸리 먹고 취한 사내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말입니다. … 열흘 전, 실로 7년 만에 당신과 해후했을 때 당신은 내게 벚꽃 얘기를 하셨습니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남(南)으로 내려가 벚꽃을 몰고 등고선을 따라 죽 북향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개화 남쪽 지점을 당신의 고향으로 정한 겁니다. 이곳 선운사는 10년 전에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 아닙니까."
선운사(禪雲寺). 줄포만의 습기를 머금고 불어 내려오는 3월의 바람이 차다. 연둣빛 봄은 아직 잎맥의 안쪽, 나무의 골수에 감춰져 있다. 천 년 하고도 몇 백 년 더 묵은 절에선 젊은 학인 스님들이 초기불교의 경(經)을 파고 있었다. 철 이른 상춘객의 버스가 먼지를 피우며 도착했다. 조각난 사랑의 기억을 어우르는 단편 '상춘곡'은 이 계절, "꽃이 피면 훠이훠이 그것들을 몰고 올라가 어느 날 아침 당신 앞산에 부려"놓을 요량으로 선운사 언저리에서 해찰부리는 남자의 고백 편지다. 소설 속에서 옛사랑의 시작을 추억하는 플래시백. 인연이 부딪칠 때의 눈부신 색채감을 표현하는 언어가 다음과 같이 황홀하다.

"당신이 찾아오리란 장담은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또 그걸 믿었대서 내려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당신이 안거하고 있는 고창 땅에 누워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으니 말입니다. …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문득 잠든 내 얼굴에 감겨드는 이상한 빛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지요. 그것은 아주 은은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느껴지는 빛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바늘 끝 같은 것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 같았습니다. … 그것이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둣빛 봄 햇살 소리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 그리고 곧 나는 알게 됩니다. 그것이 멀리서 당신이 오고 있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상춘곡'의 주인공이 갓 제대한 복학생 시절, 여인의 고향으로 무가내 쳐들어가 누워버린 석상암은 선운사에서 서쪽으로 1㎞ 남짓 떨어져 있다. 찾아가는 길가의 차밭 풍경이 고왔다. 욕심 내지 않고 찻잎의 생리를 따르는 자의 손길이 묻은 밭이다. 누가 경작하는 걸까. 허리 굽은 스님 몇 분이 지팡이 짚고 밭고랑 사이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 차밭은 고령의 노스님들이 모여 반농반선(半農半禪)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선운사 주지 법만 스님이 말해줬다. 따사롭고 은은한 얘기였다. '상춘곡'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미당 서정주로부터 선운사 만세루(萬歲樓)에 얽힌 전설을 듣고, "마음과 귀가 비로소 환하게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선운사가 백제 때 지어졌으니 만세루도 아마 같이 맨들어졌겄지. 그러다 고려 땐가 불에 타 버려 다시 지을라고 하는디 재목이 없더란 말씀야. 그래서 타다 남은 것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서 어떻게 다시 맨들었는디 이게 다시없는 걸작이 된 거지.' … 선생을 방까지 모셔다 드리고 나는 부리나케 만세루로 달려갔습니다. … 선생의 말씀대로 만세루는 타고 남은 것들을 조각조각 잇대고 기운 모양으로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어느 기둥 하나 그야말로 온전한 것이 없었습니다. … 캄캄한 어둠 속, 어쩐지 환해진 마음으로 경내를 돌아 나오다 나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흘끗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게 됩니다. 만세루 안에 하얗게 흐드러져 있는 벚꽃의 무리를 말입니다."

불에 타버린 나무를 기워서 다시 세운 만세루의 전설에 오래 전 고사(枯死)해버린 사랑의 재생을 투영하는 문학의 경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먹먹하다 할 뿐. 이른 아침에 찾아간 만세루는 옅은 안개에 싸여 있었고, 활짝 열린 만세루 안엔 벚꽃의 환영 대신 선운산의 맑은 바람만 가득했다. 터벅터벅 걸어 대웅전 뒤꼍. 동백의 꽃망울이 오줌 찬 어린아이의 고추처럼 팽팽했다. 어디선가 봄의 연둣빛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허튼 쇄설 대신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 적는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보다 투명하게 압축된 고백을, 나는 아직 다른 곳에서 듣지 못했다.

"그 향내에 발목을 묻고 나는 생각했지요. 이제 우리는 가까이에선 서로 진실을 말할 나이가 지났는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우린 진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은 지 이미 오랩니다. 그것은 한편 목숨의 다른 이름일 겁니다. …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 …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한국일보 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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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러브러… 12-08-16 12:57
답변 삭제  
문득 이 글을 읽다보니, 상사화가 피는 9월 즈음에 선운사에 가고 싶어집니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어 상사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꽃.
그러고 보면 늘 만나고 마주쳐야만 인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의 생에 다만 구경꾼으로 남아도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한 누군가의 그런 인연이 되고 싶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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